"한잔하세요"
"여보, 제발 이러지 마"
"당신에겐 내가 더없이 추해 보이겠지만 날 이렇게 만든 게 누군데.... 이제 와서 당신만 다시 정상으로 돌아가겠다는 거야?"
#알코올 중독자 부부를 다룬 <술과 장미의 나날>이란 미국 고전영화의 한 장면이다. 업무상 술을 자주 마시다 중독에 빠진 남편 탓에 어느새 아내도 알코올 중독자가 된다. 이들은 서로를 동정하며 중독에서 못 빠져나오다가 결국 남편은 헤어 나오고 이런 남편을 아내는 매우 원망한다.
오늘 오후에 한때 내가 한탄과 번민 속에 세상을 저주만 하던 장소를 잠시 방문했다. 근처 자문사에 들렀다가 저절로 발길이 이곳으로 향했다.
20여 년 전, 나와 비슷하게 한순간에 인생이 나락으로 떨어진 사람들이 이곳에 자리를 잡고 서로를 의지하며 살았었다. 다들 가족들로부터도 버림받았고 정상적인 사회활동이 어려운 상황이었기에 분위기는 막장일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몇 년을 보내던 나는 이대로 끝내기는 너무 억울해서 뭔가를 시작했고 결국 오늘에 이르렀다. 나와 비슷하게 이곳을 빠져나온 사람이 대략 10프로다.
나머지 사람들의 소식은 풍문으로만 들었지만 대부분이 잘 안 풀렸다. 제대로 일하기 힘든 상태에서 그래도 돈을 벌겠다고 병원의 임상실험에 자청했다가 거의 식물인간이 된 사람도 있다고 한다.
동굴처럼 어두운 당시 숙소 앞에서 한숨을 쉬고 있는데 인기척이 들린다.
누군가가 나오더니 나를 전혀 의식하지 않고 먹다 남은 라면 국물을 안주 삼아 소주를 마시기 시작한다.
가만 보니 낯이 익다. 내가 이곳에 머물던 막판에 새로 들어온 사람이다. 당시에도 이미 알코올 중독이 심해서 유난히 손을 떨었는데 지금은 더하다. 이곳에 들어온 직후 떨리는 손으로 라면을 끓이다 끊는 물을 자신의 발에 쏟았는데 그때의 화상 자국이 지금도 남아있다.
나를 기억하냐고 물으니 전혀 모르겠다고 한다.
주머니에 있던 몇 만 원을 다 모아서 손에 쥐여주며 설렁탕이라도 사 먹으라고 했다.
20여 년 전 나의 손에도 이렇게 3만 원을 쥐여준 누군가가 있었고 그 돈으로 술과 순대를 사서 다 함께 먹은 기억이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
고맙다며 다 찌그러진 스테인리스 컵에 소주를 따라준다.
요즘 그다지 몸이 안 좋았지만 그냥 원샷을 했다.
잊고 싶지만 잊을 수 없는 나의 과거와 이곳을 떠나지 못하고 사그라진 청춘들에 대한 존중 차원에서 무조건 마셨다.
돌아서서 내려오는 길이 유난히 울렁거린다.
한 잔의 소주나 안 좋은 몸 컨디션 때문만은 아닌듯하고 눈에서는 이유 없이 눈물이 흘러내린다.
나 혼자 떠나면 자기는 어찌 사냐며 나의 발목을 잡던 형이 생각난다.
유난히 나에게 잘해주던 형이었는데....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닌 이 형을 저승에서 만난다면 어떻게 사과를 해야 할까.
형, 정말 미안해.
내가 없으면 형 밥이랑 약을 챙겨줄 사람이 없다는 걸 잘 알았지만 내 영혼까지 좀 먹던 이곳이 너무 싫었어. 한 번뿐인 내 인생을 이곳에서 술과 담배로 끝내는 건 도저히 참을 수 없었어.
내가 지금 정도의 힘만 있었어도 형과 같이 나오거나 나중에라도 형을 보살피려 다시 들어갔을 텐데 그땐 내 한 몸 건사하기조차 힘들었어.
그래도 형, 너무 미안해.
형이 나에게 해준 걸 생각하면 나는 정말 나쁜 놈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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