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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순구개열언청이,자기혐오,포기

진실을 밝히자 돌아온 건 냉대뿐(누구도 돕지 않으련다)

by 강명주 노무사 2023. 5. 27.

내 집에서 도보로 1시간 반가량 가면 산골짜기 사이에 자리 잡은 작은 마을이 나온다.

 

오래전 #군사기지였다는 이 마을은 버스 노선도 없다시피하고 대단히 외지기에 누가 살까 의심스러울 정도이나 빈 집은 거의 없어 보인다.

 

들리는 소문으로는 신용불량자나 갑자기 큰 사고로 충격을 입어 사회에서 스스로 잠수를 타려는 자들이 주된 구성원이란다.

 

조금씩 내리는 비를 맞으며 오늘 아침 일찍 이 마을로 향했다.

 

늘 다니는 운동코스가 지겨워 이 마을로부터 시작되는 산을 타고 싶었기 때문이다.

 

마을 어귀의 작은 공원 뒤편에 도착하여 이제 막 산으로 올라가려는데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린다.

 

돌아보니 저 멀리 벤치에 앉아 있는 어떤 아가씨다.

 

손에는 지팡이를 들고 도와달라는 말을 자꾸 하는데 느낌이 쎄하다.

 

각목이나 꽃뱀이란 단어가 제일 먼저 떠올랐다.

 

가까이 가보니 날 유혹했고 얼떨결에 그걸 받아주자 갑자기 남자 놈들이 나타나 왜 자기 여동생을 건드렸냐며 경찰에 신고당하기 싫다며 돈 내놓으라는 케이스의 전형 같다는 생각이 든다.

 

바로 신경 끄며 내 갈 길 가려는데 거의 울먹이는 목소리로 이젠 외치다시피 하며 도움을 요청한다.

 

가능한 먼 거리를 유지하며 다가가 무슨 일인지 물었다.

 

근처에 사는데 장님에 가까울 정도로 시력이 나쁘단다. 빛과 어둠만 구분하는 정도.

 

갑작스런 질병으로 이렇게 된 후 학교도 자퇴하고 엄마랑 이 마을로 들어왔다가 너무 답답한 마음에 오늘 아침 엄마랑 엄청 싸우고 무작정 집을 뛰쳐나왔는데 눈이 안 보여서 길을 잃어버렸다고 한다.

 

이제 화도 좀 가라앉고 너무 무서워 집에 돌아가고프니 도와달라는 거다.

 

엄마 핸드폰 번호를 알려주면 내가 전화를 하여 이곳에 오도록 하겠다고 하자 다리가 안 좋아서 못 오기에 자기가 가는 수밖에 없단다.

 

주소를 부르기에 네이버 지도로 검색해 보니 도보로 대략 30분 거린데 나는 차를 가져오지 않았고 택시를 불러도 너무 후미져서 오지 않는다.

 

걸어가는 수밖에 없기에 내가 앞서가며 소리를 낼 테니 따라오라고 하자 아직 지팡이 사용이 익숙지 않기에 불가하단다.

 

결국 내 팔을 잡고 가겠다는 이 아가씨.

 

모르는 여자와의 신체접촉은 상대가 성모 마리아라도 피하는 나이기에 무진장 고민을 했다.

 

하지만 돌변하여 신고할 것으론 안 보이기에 큰맘 먹고 팔을 내밀었다.

 

여자가 넘어지지 않게 최대한 천천히 걷다 보니 이것저것 먼저 묻는다.

 

내가 무섭게 느껴지지 않느냐고 되묻자 전혀 안 그렇고 아주 쾌활하고 착할 것 같단다.

 

구순구개열의 부작용인지 난 변성기를 겪지 않았다.

 

그래서 애 같은 목소리를 유지 중이며 또 다른 콤플렉스다.

 

나이를 짐작해 보라고 하자 20대 중반 같단다.

 

찰리 채플린이 주연한 <시티 라이트>라는 영화가 있었다.

 

부랑자인 찰리 채플린은 어느 날 꽃 파는 장님 소녀를 만나고 자신은 부자라고 구라를 친다. 그러며 둘은 가까워지고 우연히 백만장자를 구해주고 큰돈을 얻은 찰리 채플린은 이 돈으로 소녀의 눈 수술을 시켜준다. 하지만 백만장자로부터 돈을 훔쳤다는 오해를 사서, 수술을 마친 소녀를 만나지도 못한 채 바로 교도소에 가고 몇 년 뒤 출소한다. 여전히 부랑자 신세를 못 면한 채 떠돌던 찰리 채플린의 눈에 이제는 정상적인 시력을 되찾은 소녀의 모습이 들어온다. 하지만 자신에게 도움을 준 찰리 채플린이 부자라고만 생각했고 수술 후 한 번도 그를 만난 적이 없는 소녀는 부랑자인 찰리 채플린을 못 알아본다. 부끄러운 마음에 진실을 밝히지 못한 채 계속 쳐다만 보는 찰리 채플린을 동정하게 된 소녀는 약간의 돈을 건네주고 손끝의 미묘한 느낌을 통해 이 부랑자가 그때 자신을 도와준 남자라는 걸 알아채며 영화는 끝난다.

 

젊은 사람 같다는 이 아가씨의 답변을 듣는 순간, <시티 라이트>가 떠오르며 내 진짜 나이를 안 밝힌 채 계속 젊은 척하며 이 아가씨와 가까워지고 싶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하지만 달콤한 거짓보단 쓰라린 진실을 선호하는 성격이기에 바로 마음을 돌려 내 진짜 나이를 밝히자 많이 놀란다.

 

얼굴에 큰 흉터를 남기는 구순구개열이란 유전병을 가지고 태어났기에 목소리만 젊다는 말도 했다.

 

진짜 내 나이를 밝히고 구순구개열 이야기까지 해서인지 갑자기 말수가 줄어든다.

 

조용히 걷다 보니 이 아가씨 집에 도착했다.

 

작은 빌라던데 계단을 같이 올라갔고 벨을 대신 눌러 주었다.

 

엄마로 보이는 여자가 문을 열더니 반갑게 맞이한다.

 

나를 위아래로 훑어 보기에 전후 사정 이야기를 하자 말로는 고맙다고 하면서도 내 노쇠한 외모와 얼굴 흉터 탓인지 영 꺼려 하는 눈치다.

 

내가 만약 젊고 흉터도 없는 정상인이었다면 고마우니 커피라도 한잔하고 가라는 말을 하지 않았을까?

 

이 아가씨마저 내가 나이 든 기형인이란 걸 알고 완전히 흥미가 떨어졌는지 아무 소리 안 하며 어서 가라는 분위기만 풍긴다.

 

죄인처럼 그냥 걸어 나오는데 기분이 참 그렇다.

 

대가를 바란 건 전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이런 홀대를 예상한 것도 아니었는데.

 

전술한 <시티 라이트>나 일본영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같은 안 좋은 상황의 여자와 정상적인 남자가 만나서 사랑에 빠지는 영화를 보면 한 가지 철칙이 있다.

 

주인공 남자는 반드시 젊고 정상인이라는 점이 그것이다.

 

설사 직업은 <시티 라이트>의 찰리 채플린처럼 부랑자일지라도 외모만은 번듯하고 싱싱하다.

 

난 이미 엄청 늙었다.

 

마음과 목소리는 아직 청춘이나 물리적 나이는 곧 노인 소리를 들을 지경이다.

 

구순구개열 없이 태어났다면 젊어서 나도 꽤나 많은 인연을 만들 수 있지 않았을까?

 

내가 노력하여 객관적으로 이룬 성과를 생각하면 평균 이상의 연애 생활을 즐길 수 있었을 것 같은데....

 

아니, 지금이라도 구순구개열만 없다면 다양한 여자들과 즐거운 만남을 이어갈 수 있을 텐데.

 

하지만 현실에서 난 어려서부터 늘 기피의 대상이었고 전술한 장님 아가씨와 그 엄마에게서도 이를 확인했을 뿐이다.

 

아무리 안 좋은 상황에 놓인 상대에게도 절대 도움을 안 주겠다고 오늘 일을 계기로 맹세한다면 사람들은 날 타박하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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