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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장애, 더불어 살자

장애인의 의지가 드디어 꺾이는 그날의 여파

by 강명주 노무사 2023. 5. 21.

#선천적이든 후천적이든 일반인과 신체조건이 다른 자를 장애인이라 간주할 때, 이들 모두가 애초부터 인생을 포기하는 건 절대 아니다.

주위의 격려 혹은 본인의 의지에 힘입어 어떻게든 정상인처럼 살아보려 갖은 노력을 다하는 시기가 누구에게나 있게 마련이다.

그동안, 제대로 된 일자리를 구하고 무엇보다 중요한 혼인에 성공하여 애까지 낳으면 이 장애인은 남은 인생도 대단히 높은 확률로 정상인처럼 살게 되어 있다.

하지만 이 같은 행운을 얻는 장애인은 극히 드물다.

다수는 아무리 노력을 하며 살아도 할 일을 못 구하거나 결혼에 실패하여 결국 모든 걸 포기하는 그날을 맞이할 뿐이다.

난 어릴 때부터 구순구개열이란 내 약점을 가능한 무시하고 지내려 무지 노력했다.

학예회 등에서 일부러 앞에 나서는 역할을 스스로 지원했고 공부를 잘해야 이런 기회가 자주 주어진다는 걸 알곤 무진장 열심히 공부를 했다.

그래서 당초 목표엔 미치지 못하나 그런대로 괜찮은 대학의 좋은 학과에 진학했고 어느새 졸업생이 된다.

연애를 한 번도 못 해본 게 마음에 걸렸지만 그 결정적 원인인 구순구개열은 애써 고려치 않으며 단지 운이 없었고 좋은 직업 얻으면 너도나도 달려들 거란 자기 위로에 치중했다.

우리 때는 학과 사무실로 각 기업 입사원서가 왔고 여기에 자필로 적어서 오프라인으로 제출한 후, 면접 연락이 오면 이를 보고, 통과하면 최종 합격되는 게 대학생들의 일반적인 취업 방식이었다.

내가 다니던 고대 통계학과 사무실에는 통계학에 대한 수요가 많은지 쓰레기처럼 나뒹굴 정도로 많은 원서들이 쌓였고 난 마음에 가장 드는 세 곳의 원서를 가져다가 작성하여 직접 그 회사 본사까지 가서 냈다.

학점이 아주 낮지만 않은 이상, 고대 통계학과 정도면 엔간한 곳은 다 합격하는 게 당시 분위기였다.

하지만 나는 3곳 모두 불합격한다.

그것도 면접까지 다 보고 이런 결과를 얻었다.

면접을 보러 오라는 연락만 오면 거의 100프로 합격이기에 미리 축하주 마시는 친구들도 많다는 걸 알던 나는 정말 이해가 안 갔다.

고민을 하다 모 대기업 인사팀에 있는 학과 선배를 찾아갔다.

사정 이야기를 하며 왜 나에게만 이런 일이 생기는지 이유가 짐작되냐고 묻자 길게 한숨을 쉬더니 내 얼굴의 흉터 탓일 거란다.

연구직이나 기술직처럼 극소수 내부인만 상대하는 업무라면 몰라도 내가 지원한 일반적인 사무직은 외부 이미지도 고려하기에 장애인은 거의 안 뽑고 특히 얼굴기형은 100프로 낙방시키는 게 관행이니 마음 추슬러서 다른 일을 찾아보라는 위로까지 해줬다.

내가 최초로 삐뚤어지기 시작한 건 바로 이날이었다.

4년 내내 여자들이나 쫓아다니다 교수에게 어떻게든 빌어서 간신히 졸업할 정도로 학점이 개판인 인간들도 다들 취업하는 판국에 장학금까지 받던 내가 얼굴기형만을 이유로 비선호된다는 사실은 내 가치관과 삶의 방식에 지대한 악영향을 준다.

그 후 다른 사고까지 겹치며 10여 년을 요양원에서 낭비하고 말았는데 결과론이지만 전술한 세 곳 중 단 한곳에서라도 날 뽑아줬다면 난 사고를 당한 장소에 아예 갈 일이 없었기에 이 불행을 피할 수 있었다.

청춘을 요양원에서 모두 날려버리고 다행히 몸이 좋아져 나온 후, 뒤늦은 나이에 노무사가 되었다.

아주 대단한 일은 아니었지만 최소한 국가고시는 얼굴기형이라도 차별하지 않기에 도전하여 붙은 것이다.

비록 중년이지만 노무사가 되었으니 과거는 어떻게든 다 잊고 건설적으로 살려고 했다.

그러면서 여자를 만났고 결혼 약속까지 잡는다.

하지만 내 얼굴 기형이 구순구개열 때문임을 알자 그 집안사람 모두가 쌍수를 들어 반대하기 시작했고, 나 없으면 죽는다던 그녀조차 자식에게 내 기형이 유전되는 건 도저히 못 견디겠다며 종국엔 파혼을 선언한다.

내가 두 번째로 삐뚤어지기 시작한 건 이날이었다.

직업에선 그래도 국가고시 등을 통해 노력하면 내 기형으로 인한 불이익을 이겨낼 수 있으나 유전이라는 이유로 거부하는 여자들을 이해시킬 방법은 전혀 없기에 말 그대로 결정타였다.

내 인생은 이날 이후 좀비처럼 변해버렸다.

굶어죽을 수는 없기에 일을 하기는 하나, 나 하나 목에 풀칠할 정도에 그칠 뿐, 절대 더 이상은 노력하지 않는다.

어차피 자식도 못 얻을 인생, 가정도 못 꾸릴 팔자라는 생각에 늘 수박 겉핥기 같은 삶만 영위하고 있다.

이런 내 과거는 모른 채, 왜 희망을 버렸냐고 뭐라 하며 힘을 내라는 격려를 하는 자들을 요즘도 종종 만난다.

난 그냥 웃기만 한다.

너희들이 나에 대해 뭘 알기에 그런 말 함부로 하냐는 화를 낼 힘조차 없고, 가치조차 못 느끼기에 그냥 무시하는 것이다.

그래도 난 평타는 친 셈이다.

요양원에서 알게 된 많은 장애인들은 요양원에서 나와 다시금 잘 살아보겠다고 젖 먹던 힘까지 다했지만 전술한 나와 마찬가지로 직업, 결혼 등에서 좌절을 맞보곤 알콜중독이나 범죄자가 되는 등 완전히 몰락해 버려 이젠 연락마저 되지 않는다.

장애인에게 함부로 힘내라는 말 하기 전에 꼭 한 번 생각해 보라.

당신이 별생각 없이 내 뱉는 그 말이 그 장애인에겐 이제 막 딱지가 앉으려는 상처를 후벼파는 말일지도 모른다는걸.

ps: 어릴 때 나에게 구순구개열은 아무것도 아니니 충분히 이겨낼 수 있다는 말을 해준 사람들이 요즘도 선명히 기억난다. 이들에게 조금이라도 고마움을 느끼고 있을까? 전혀 아니다. 괜한 기대만 품게 하였기에 가능만 하다면 칼로 난도질하여 죽여버리고 싶을 정도로 증오스럽다. 장애 가진 애에겐 어느 정도는 현실도 알려주는 걸 나는 그래서 지지한다. 아무리 아파도 어쩔 수 없다. 수십 년 후, 괜한 기대가 꺾이고 느낄 좌절감보다는 나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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