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료 강의하며 느끼는 점.
1. 공유지의 비극
“수강 태도 나쁘거나 예의 없는 수강생은 쫓아낼 수 있는 권한을 제게 주세요”
내가 무료 강의하며 유일하게 내거는 조건이다. 이 조건 없이 강의를 해보니 분위기가 진짜 개판 5분전이었다. 자신들에게 도움은 되지만 얼마든지 무료로 들을 수 있다고 여겨서인지 강의하는 내 면전에서 큰 소리로 통화를 하는 등 말로 형언하기 힘들 지경이었다. 누구나 공유지를 쓰게끔 하면 남들 생각 안하고 이기심만 내세우기에 결국 공유지는 황폐해지기만 한다는 유명한 이론은 여기서도 유용한 듯했다. 조금만 예의 없어도 바로 내보내자 오히려 내 강의로 도움 받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조건 없는 사랑은 애를 망치기도 할 것이다.
2. 다양한 협박
한밤중에도 종종 이상한 전화를 받는다. 아마도 내 강의를 들은 사람들이 법적인 조치를 취하는 통에 궁지에 몰린 사용자들이 하는 전화 같다. 이들은 나에게 왜 쓸데없는 말 하고 다니느냐고 항의를 하는데 더 나아가 협박도 서슴지 않는다. 협박죄는 다들 알다시피 구체적인 해악의 고지가 필수인데 이 정도까지 안가는 협박도 많이 경험했다. 지금 법체계로는 나 같은 사람은 거의 보호를 못 받는다. 밤길 조심하라는 말은 하도 들어서 이젠 반갑기까지 한데 내가 비정상이겠지?
3. 감사의 전화
교통비 정도만 받고 내가 아는 모든 걸 알려주는데 임금 등을 받고나서 전화라도 한 통하는 사람은 솔직히 거의 없다. 어차피 기대도 안했지만 조금 섭섭한 건 사실이었다. 근데 나중에 알고 보니 혹시 내가 성의표시라도 하라는 말을 할까봐 이러는 눈치였다. 난 그런 사람 아닌데. 그냥 말로라고 고맙다고 하면 그것만으로도 생의 이유를 찾을 수 있겠는데. 충분히 이해하지만 아쉬운 건 어쩔 수 없다.
4. 무료로 하는 이유
원래는 1인당 만원이라도 받으려 했다. 내 강의를 통해 노동법상 각종 권리를 찾을 수 있다면 이 정도는 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몇 년 전부터는 이마저 포기했다. 정말 상황이 안 좋은 사람들이 적지 않음을 실감했기 때문이다. 어떤 아줌마를 알았는데 못 받은 임금이 꽤 됐다. 남편은 죽고 혼자 애들을 키우는 입장이라 꼭 받아야 했기에 내 강의에 나오시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하지만 이 아줌마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고 나중에 연락해보니 버스비가 없어서 못 나온 거였다. 당시 몸이 아파서 집에서 쉬고 있었는데 애들 라면이라도 먹이고 나니 정말 돈이 한 푼도 없었단다. 빌리면 되지 않느냐고 생각할 수 있는데 과거 요양원에 있으며 나 또한 비슷한 경험을 했기에 이 말 하기가 얼마나 힘든지 너무 잘 안다. 그 후론 이런 사람들에겐 내가 교통비를 그냥 준다. 나도 가난하지만 이 정도는 할 수 있다.
5. 변한 세상
누가 그랬다. 30년 전만해도 이런 강의하면 잡혀갔을 지도 모른다고. 당시는 권리 찾으려는 근로자들에게도 마구 빨갱이라는 누명을 씌우는 사회 분위기가 농후했기에 빈말은 아닐 것이다. 민주화된 세상의 덕을 나는 보고 있는 거다.
6. 환희
여튼 내 강의를 통해 못 받은 임금을 받거나 사장의 사과를 들음으로써 마음이 풀린 사람들이 그 덕에 새롭게 살아갈 힘을 얻는 걸 보면 난 환희를 느낀다. 그래서 이 짓을 계속하는 걸 거다.
7. 미안함
원래는 노무사들에게 수수료 주고 처리할 일인데 내가 강의를 통해 아주 자세히 알려주니 자체적으로 처리하는 거다. 그래서 주변 노무사님들에겐 그저 송구할 뿐이다. 이분들도 땅 파서 장사하시지는 않을 텐데. 노무사 모임에 거의 안 나가는 이유도 이거다. 이 죄송함은 영구히 나를 괴롭힐 것 같다.
8. 내세
내세울 거 하나 없는 삶이지만 이렇게 살다가 죽으면 염라대왕이 조금은 측은히 여겨서 내세에는 좀 정상적으로 태어나게 해주려나? 이 기대는 왜 날 떠나지 않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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