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남자는 일단 첫인상이 대단히 좋았다.
환갑에 가까운 나이지만 끽해야 40대로 보이는 얼굴에 근력운동을 많이 했는지 체격도 아주 남자다웠다.
당시 내가 거주하던 요양원에 종종 찾아와 라면이나 야채 등 각종 #음식을 무료로 주고 가는 이 사람에 대해선 여러 가지 썰이 돌곤 했다.
대단히 큰 회사 사장인데 어린 아들이 죽은 뒤 그 넋을 달래러 우리 같은 갈 곳 없는 사람들에게 온정을 베푼다는 주장, 건강해 보이나 실제론 시한부 인생 판정을 받고 천당에 가기 위해 일부러 착한 일을 몰아서 하고 있다는 견해, 아무리 해도 자식이 안 생기기에 선행이라도 해서 하늘을 감동시키려 이런다는 의견 등이 난무했다.
어쨌든 3달에 한 번은 꼭 들러 우리들에게 아주 요긴한 식료품을 그 흔한 공치사 하나 남기지 않고 전해주는 이 남자는 모든 원생들에게 세계 4대 성인 같은 존재였다.
여전히 내가 그곳에 머물던 어느 여름, 읍에 나가 간단한 알바를 하고 돌아오던 길에 이 남자의 차가 펑크가 나서 마을 어귀에 서 있는 것을 봤다.
뭐라도 도와주고픈 마음에 달려가 보니 차 안에서 혼자 염주 같은 걸 들고 열심히 기도 중이다.
방해를 하지 않기 위해 돌아서는 나에게 갑자기 그런다.
좀 있다 보험회사에서 올 테니 괜히 원생들 데려올 생각 말고 이거나 먹으라고.
그러면서 큰 아이스박스에서 하드를 하나 꺼내 준다.
내가 요양원에 거주하는지 어찌 아냐고 묻자 너도나도 싸우듯 받아가는 각종 간식을 맨 뒤에 서서 남들이 다 받아간 뒤에야 수줍게 가져가는 모습이 인상 깊었기에 기억한단다.
남의 호의를 계속 아무 대가 없이 받는다는 사실 그 자체만으로도 너무 수치스러워 그랬단 말이 나도 모르게 내 입에서 나왔다.
그러며 뭐가 그리 서러웠는지 갑자기 나는 울음을 터뜨렸다.
가족들과도 연락이 안 되는 처지에 누군가가 날 기억해준다는 사실이 너무 고맙고 애틋하게 느껴져서 그랬을 것이다.
한참을 우는 나에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윽고 내가 잠잠해지자 자신이 좋은 사람 같으냐고 갑자기 묻는다.
질문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하여 당황한 모습만 보이고 있자 사람 죽여 본적 있냐고 또 묻는다.
얼떨결에 없다고 하자 자신은 있다며 이 점만 봐도 내가 자기보다 좋은 사람이니 자신의 호의에 너무 부담 느끼지 않아도 된단다.
잠시 뒤 보험회사 차가 도착을 했고 그날의 대화는 이 정도에서 스톱을 했다.
다시 몇 달이 흐른 가을의 문턱에서 그를 다시 만났다.
이번에도 읍에 나가 볼일을 보고 오는데 그의 차가 맞은편에서 보인다.
이미 요양원을 방문하고 돌아가는 길 같던데, 차를 세우더니 나를 찾아봤지만 없어서 섭섭했다는 말부터 한다.
그러면서 가져간 간식은 다른 원생들에게 이미 모두 나눠준 통에 나에겐 하나도 주지 못하여 미안하단다.
괜찮다고 말하는 나에게 배가 고파서 라면을 먹고프니 같이 먹자고 권한다.
실비만 받고 라면을 끓여주는 어느 조그만 슈퍼에 같이 들어갔다.
난 전혀 생각 안 하고 있는데 소주도 시키더니 한 잔 따라준다.
요양원에선 라면도 귀하기에 열심히 먹고 있는 내 앞에서 이 사람은 소주만 연신 마셔댄다.
염치없지만 많이 배가 고팠기에, 안 먹을 거라면 당신의 라면을 내가 먹어도 되냐고 물었다.
흔쾌히 그러라며 자기는 갑자기 소주만 생각난단다.
이렇게 나는 라면 2개를, 이 남자는 소주 2병을 먹었다.
그때는 지금처럼 음주단속이 심하지 않았고 장소도 시골 깡촌이라 별 문제 안 되었지만 술 깰 때까지 대화나 나누잔다.
왠지 하소연이 하고 싶어져 내가 어쩌다 여기까지 흘러왔는지 사고를 중심으로 이야기했고 그는 많이 답답하겠다는 위로를 해줬다.
문득 지난여름에 이 사람이 사람을 죽인 적 있다고 말한 게 떠올라 진짜냐고 물었다.
그렇단다.
자신의 부친을 자살하게 만들고 나머지 가족 모두의 삶을 지옥으로 변하게 한 장본인을 이 남자가 20살이 되었을 때 다시 만났고 도저히 그냥 보낼 수 없어 죽이고 말았단다.
처음 경찰 조사를 받을 땐 당연히 사형이 나올 거란 생각에 별다른 변명도 못했지만, 국선 변호사가 운 좋게 좋은 사람이라 재판에선 이 변호사의 권유로 모든 걸 털어놨고 판사가 이를 참작했는지 예상보다 대폭 낮은 형량을 준 덕에 생각보다 일찍 사회 복귀가 가능했단다.
그 후, 모 회사에 들어가 아주 열심히 일했고 사장의 눈에 들어 조기 승진을 반복했단다.
그러던 어느 날, 자신의 과거에 대해 솔직히 고백하는 게 자신을 믿어주는 사장에 대한 도리 같아서 살인 이야기를 꺼냈고 사장은 지금은 어떤 감정인지 물었으며 살인은 그 자체만으로 아주 큰 잘못이기에 절대 반복할 생각 없고 다만 어릴 때의 한이 그 일로 모두 풀렸기에 앞으로 엔간한 일은 다 참을 수 있을 것 같다고 답했단다.
사장은 그럼 됐다면서 그 살인에 대해선 자기 이외의 누구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했고, 결국 이 사장 덕에 돈도 많이 벌고 풍족해져서 지금은 근처 요양원이나 보육원에 기부를 다니며 살인 자체에 대한 자발적인 속죄를 하고 있단다.
후회를 하냐고 물었다.
솔직히 말해 전혀 아니란다.
이렇게 느끼는 사실 자체가 큰 죄 같아서 계속 기부행위를 하고는 있지만 조금도 후회스럽지 않단다.
손자까지 보고 아주 잘 사는 이 사람의 누나가 언젠가 그랬단다.
네가 그 원수새끼를 죽여준 덕에 한이 다 풀려서 지금은 마음이 너무 편하다고.
다른 형제들도 모두 이렇게 느끼는 듯하고 자신도 마찬가지라는 말을 이 남자는 했다.
난 이미 아주 나이가 많다.
그런데 꼭 죽여야 할 누군가가 자꾸 생각이 난다.
젊어서부터 느끼던 감정이었지만 그때는 애써 무시하고 억눌렀는데 요즘 들어 내 의지가 무색해질 정도로 불쑥불쑥 튀어 나온다.
그러면서 전술한 남자를 다시금 자주 떠올린다.
이 남자가 살인을 안 했어도 그토록 좋은 외모를 유지한 채 사회적으로 성공도 하고 무엇보다 아주 원만한 성품을 가질 수 있었을까?
자기 입으로, 만약 그 원수를 죽이지 못했다면 정신병자 됐을 거란 말을 분명히 했는데.
내가 요즘 딱 이 남자처럼 느끼고 있다.
근데 문제는 이젠 내가 너무 늙었다는 점이다.
이제와 누굴 죽인다면 아무리 좋은 판검사 만나 낮은 형을 받아도 죽을 때까지 감옥에서 못 나올 가능성이 아주 짙다.
아~~~ 공부도, 사업도, 사랑도 가능한 젊어서 시도하라더니 살인도 마찬가지인 걸까?
교도소 무서워 그냥 참자니 속이 썩어 문드러지고, 감정을 그대로 표출하여 복수하자니 교도소가 무섭고.
왜 좀 더 젊을 때 이 감정의 존재를 인정하고 신중히 고민하지 못한 걸까?
난 왜 늘 이리 판단 미스만 하나.
바보 멍충이 강명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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