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홍윤표
1. 일단 이 책은 무지 술술 읽힌다. 시중에 나와있는 #중국 근현대사 관련 책들 상당수는 외국인이 쓴 걸 번역했고 그 번역의 질이 하도 낮기에 읽다가 던져버리고 싶은 충동을 자주 느꼈다. 하지만 이 책은 저자가 한국인이고 글솜씨가 뛰어나기에 가독성이 짱이다.
2. 장개석과 모택동 간 벌어진 전쟁에서 활약한 스파이들을 다뤘다. 서양인 스파이와는 달리 흔하게 접하기 어려운 동양인 스파이가 주인공이기에 호기심에 골랐고 다 읽고 난 지금 이 선택에 십분 만족하고 있다. 앞부분에선 장개석과 모택동이 지휘한 스파이 부대 전반에 대한 거시적인 서술을 하고 있고 중반부 이후는 모택동 편에서 싸운 스파이들을 집중 소개한다. 장개석 측의 스파이는 관련 정보를 얻기 어렵고 아무래도 승리자가 모택동이다 보니 이런 식의 서술을 한 듯한데 그닥 거부감은 생기지 않았다.
3. 스파이 이야기 말고도 얻을 게 아주 많다. 첩보영화 같은 흥미 위주의 내용이 주를 이룰 거란 예상을 깨고 20세기 초중반 중국의 정치, 경제, 사회, 군사 등 다방면에 대한 아주 고급 정보들이 넘쳐나도록 많다. 저자는 정외과를 나와 중국공산당에 대한 연구로 석사학위를 받았던데 엄청 공부를 많이 한 듯하다.
4. 치밀하게 많은 각주가 신뢰도를 꽤나 높인다. 거의 모든 페이지 하단을 채우고 있는 논문에 육박할 정도의 각주를 보니 어설프게 쓴 책이 아니란 느낌이 팍 온다. 이 정성을 봐서라도 열심히 정독했다.
5. 장개석이 왜 모택동에게 질 수밖에 없었는지 늘 궁금했고 다른 책들을 통해 부정부패가 주된 원인이라 결론 내렸는데 여타 이유도 있겠다는 걸 이 책을 통해 알게 되었다. 장개석은 인간의 스펙을 중시한 반면, 모택동은 마음을 중시했다는 점이 바로 그것이다. 이 부분은 이 책에 직접 나온 건 아니고 내가 유추한 것이기에 틀릴 수도 있다. 그런데 스파이들을 포섭하거나 키워서 장개석 측에 투입하고 이들을 통해 정보를 얻어낸 전체 과정을 보면 모택동은 능력 이전에 열정이나 포부, 의지를 중시했지만 장개석은 스펙만 좋으면 무조건 믿고 한자리 주는 통에 결국 스파이 전쟁에서 패배하여 결국 중국대륙을 넘겨준 듯하다. 다소 다른 이야기겠지만 노무사로서 여러 회사의 인재육성을 지켜보다 보면 비슷한 사례를 종종 목도한다. 얼마나 이 지원자가 심지가 깊고 의리가 있는지를 중시하는 사장은 채용한 직원에게서 배신만은 거의 당하지 않지만, 학벌, 능력 등에 지나치게 많은 비중을 두고 뽑은 사장들은 상당수가 결국 뒤통수 맞고 무척이나 마음고생하는 걸 노무사로서 왕왕 접했다.
6. 장개석의 최측근 군사참모, 바로 옆에서 모든 회의내용을 기록하는 속기사, 가장 신뢰한 경제브레인 모두가 모택동이 투입시킨 스파이였다. 이러고도 장개석이 이겼다면 그게 오히려 더 이상했을 것이다. 난 정치성향은 진보이고 보수를 안 좋게 보지만 안보관에선 극우다. 과연 우리나라 정부 내엔 북한의 스파이가 없을까? 스탈린과 모택동의 꼬붕 역할을 자처한 김일성의 후예들이 지배하고 있다는 북한의 특성을 고려한다면 꽤나 많을 것 같은데....
7. 10년 넘게 자신을 아들처럼 여기고 믿어주며 키워준 은인조차 스파이들은 서슴지 않고 배신했다. 과연 이념이 뭘까? 그토록 중요한가? 이들이 이런 만행을 저지르면서까지 지키려 한 중국공산당의 현재 모습은 어떠한가? 평등을 그토록 외치더니 소수 집권층과 그 가족들이 모든 걸 해먹지 않나? 내가 이들 스파이였다면 억울해서 눈도 못 감을 것 같은데....
8. 공산당을 위해 목숨까지 내놓고 희생한 스파이들의 말로末路는 생각보단 안 좋은 경우도 적지 않았다. 어차피 장개석 정부는 부르주아들의 집합체였고 그렇기에 스파이들도 이런 성향이 있어야 접근 가능했을 텐데, 문화대혁명 시절 이들 일부는 이 성향 탓인지 우파로 간주되어 모진 고문과 탄압에 시달렸다. 스파이들의 이런 특수성을 몰랐을 리 없으면서도 애써 모른 척한 모택동의 잔인함에 나는 이가 갈린다. 주은래는 그래도 좀 도우려 했나 본데 힘이 닿지 않은 경우도 많았단다.
9. 매카시는 단순한 정신병자는 아니었나 보다. 중국이나 소련뿐만 아니라 미국에도 공산주의를 신봉하여 각국의 공산당을 지원하려는 양키들이 적지 않았던 것 같다. 모택동의 승리에는 이들 역시 한몫한 게 분명해 보인다. 매카시에 대한 재평가도 필요하지 않을까?
10. 중국 공산당 스파이조직을 최초로 만든 자는 주은래였다. 온화한 미소를 늘 띠며 그저 인자해 보이기만 하는 그의 내면엔 더 없는 잔인함도 있었는지 변절자에 대한 처벌에 있어선 무진장 냉혹했다. 변절자 본인뿐만 아니라
그 가족, 심지어 아무 상관 없는 이웃 주민마저도 비밀 유출을 막아야 한다는 이유만으로 한자리에서 모두 목을 졸라 살해하도록 지시한 사람이 바로 주은래이다. 참고로 우리나라 정보기관의 효시인 중앙정보부를 창설한 사람은 바로 박정희 시절 영원한 2인자였던 김종필이었다. 주은래 역시 모택동의 2인자로서 아주 오랜 기간 활동했다는 걸 생각하면 정보부(스파이 조직)와 2인자 간엔 뭔가가 분명히 있나 보다.
11. 책 내용과 전혀 상관없는 여담이지만 100여 년 전에도 안경을 쓴 사람들이 적지 않았음을 이 책에 나오는 사진들에서도 확인했다. 그때도 광학기술은 꽤나 발전했었나 보다. 하지만 더럽게도 팔자가 안 좋던 나는 100년이 지난 후 현대사회에서조차 극도로 낮은 시력에도 안경을 쓰지 못하고 유년기를 보낸 통에 시력이 이 모양이 돼버렸고 이미 망막에 구멍까지 한 번 뚫려 수술까지 받았다. 내 눈을 이렇게 만든 자들에 대한 분노를 과연 난 억누를 수 있을까.
'책, 문학, 글쓰기, 번역' 카테고리의 다른 글
보고서 잘 쓰는 요령(내 돈벌이의 비결) (0) | 2023.02.04 |
---|---|
성범죄자 고은 시인의 문단복귀에 그저 침묵하는 다수 문인들 (0) | 2023.01.11 |
도박묵시록 카이지에게 쓰는 편지 (0) | 2022.11.28 |
독후감: <한낮의 어둠> (이념에 모든 걸 걸었던 자들에 대한 소설) (0) | 2022.09.07 |
더티한 나를 변명하기 위해 또 빌려온 책 (0) | 2022.09.04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