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업엔 귀천이 없다.
하지만 종사자에 대한 발전과 퇴보 측면에선 구분이 가능하며 개나 소나 가능한 직업 대부분은 불행히도 퇴보를 가져온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노무사가 되겠다고 마음먹은 건 사과장사를 하던 어느 겨울날 아침이었다.
소매상을 하던 아는 형과 같이 동업을 했는데 도매상에서 떼어오는 물건의 질과 가격이 우리 몫을 결정했다.
우리가 자주 가던 단골 도매상에선 매주 1번씩 아침마다 물건을 소매상에게 팔았고 어떤 사과를 얼마어치나 살 수 있는지는 선착순이었기에 경쟁이 정말 치열했다.
새벽같이 도매상 근처에 도착해 잠시 차 안에서 눈을 붙이다 도매상 문이 열리자마자 들이닥치는 게 우리 스타일이었고 이와 유사한 소매상들이 많았기에 몸싸움도 자주 벌어졌다.
어느 날 아침, 이렇게 또 간신히 물건을 확보하고 도매상 그리고 다른 소매상들과 함께 여느 때처럼 담배를 피우며 이야기를 나누던 차에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늘상 하는 시시껄렁한 이야기나 음담패설이 이날따라 영 짜증 나며 지금 같은 인생의 끝엔 뭐가 있을지 갑자기 겁이 덜컥 난 것이다.
크게 저축이 가능한 것도 아니고 그냥 내 한 몸 건사할 정도의 돈만 버는 상태에서 무엇보다 그닥 생각할 필요가 없기에 자꾸 지력을 퇴보시키며 다른 소매상들 마냥 나도 욕망만을 좇는 짐승으로 변모시키는 당시의 삶의 끝엔 결국 몰락만이 기다리고 있을 것 같았다.
바로 다음 날. 나는 형에게 이제 그만 일하겠다고 선언한다.
요양원에서 오래 지내다 청춘 다 날리고 별다른 사회경험도 없던 내 상황을 잘 알던 형은 딱히 할 게 있느냐는 말을 비웃듯이 했고 난 노무사 시험을 보겠다고 답했다.
그 시험 어렵다던데 지금 너처럼 많은 나이에 가능하겠냐고 다시금 걱정을 가장한 조소를 보내왔고 나는 설사 실패하더라도 몇 푼 안 되는 돈 벌겠다고 몸싸움이나 하는 지금의 삶을 계속하다 마침내 시장바닥에서 흔히 보이는 개념 없는 장사치나 되는 것보단 나을 것 같다고 말했다.
아는 사람이 대기업 비서실에 다니는 데 이직을 심각히 고민 중이다.
말이 좋아 대기업이지 이 회사 회장이나 그 아들들이 건드린 여자들 뒤치다꺼리하는 게 이 사람의 업무이다.
법을 모르는 여자들은 적당히 겁을 줘서 쫓아내고 뭘 좀 아는 애들은 돈 좀 쥐여주고 비밀유지서약서 받은 뒤 입을 닫게 한단다.
그래도 세칭 명문대 인기학과를 나온 자신이 왜 이런 일을 해야 하는지 모르겠고 이렇게 10년, 20년 살다 보면 남는 게 뭐겠냐며 나에게 하소연을 다 했다.
당장 연봉은 아주 높지만 이 사람 말대로 이 일의 비전은 전혀 없다.
그래서 나는 강력히 이직을 권했지만 월급이 삭감되는 걸 겁내는 그 아내는 이 사람의 고민 따윈 아랑곳 않고 어떻게든 버티라는 말만 한단다.
계속 사과장사를 했다면 내 인생은 어찌 되었을까?
그때 알고 지내 소매상 대부분은 몸싸움이나 해서 겨우 먹고사는 자신들의 삶에 대한 자격지심에 술과 여자에 빠져 지냈고 마침내 중병에 걸리거나 노숙자 되었다는 소식을 많이 들었다.
그들이 느꼈던 창피함을 나 역시 동일하게 느꼈었고 나름 내 학벌이 가장 좋았기에 강도가 가장 셌을 것이다.
노무사로 일하는 게 100프로 만족스럽진 않다.
하지만 항상 생각을 해야 한다는 점만은 진짜 짱이다.
노무사가 안 되었다면 현 사회시스템을 전혀 모른 채 여전히 막연한 두려움과 불만 속에 살았을 게 뻔하기에 백 번을 생각해도 노무사 도전은 내 인생에서 가장 잘 한 일이라 자신 있게 외칠 수 있다.
돈만 많이 벌면 좋은 직업일까?
해당 직업이 과연 어떤 기분을 느끼게 하는지도 중요할 텐데 이를 왜 대다수는 경시할까?
그러다 나이 들어 이직도 힘들어지면 정말 정말 무서운 자기혐오란 괴물이 슬그머니 고개를 내밀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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