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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문학, 글쓰기, 번역

인상 깊게 봤던 책 속의 음식 묘사들

by 강명주 노무사 2022. 9. 2.

대충 기억나는 책 속의 음식 묘사들

1. #김훈의 <공무도하가>

이름은 기억 안 나는데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두 젊은 남녀가 밤에 라면과 김밥을 같이 먹는 장면이 나온다. 라면을 끓이면서 파와 계란을 넣고 파의 유래에 대해 이야기하며 한밤중 라면의 향긋함과 날카로움을 논하는 부분이 상당히 인상적이다. 이 장면을 밤에 읽는다면 십중팔구 라면이 갑자기 먹고 싶어질 것이다.

2. 헤밍웨이의 <무기여 잘 있거라>

군인인 주인공 남자가 포탄이 퍼붓는 전투 중에도 시장기를 느끼고 지휘관에게서 스파게티 한 접시와 치즈 한 조각을 얻어 온다. 동료들과 둘러앉아 포크도 없이 한 번씩 돌아가며 손가락으로 집어먹는 장면이 기억이 난다. 포탄이 일으킨 먼지가 덮인 치즈 표면을 칼로 들어내고 그 치즈를 먹는 장면도 생생하다. 스파게티 소스와 면 그리고 치즈는 가격도 저렴하니 이 장면을 읽고 직접 해먹어 보길 추천한다.

3. 헤밍웨이의 <무기여 잘 있거라>

이 소설은 반전 소설의 기수로서 상당한 문학성을 자랑하는데 식탐이 많은 나는 불행히도 먹는 장면 위주로 기억하고 있다. 소설 후반부에 보면 주인공 남자가 사랑하는 여자와 중립국인 스위스로 도망간 후, 여자는 출산을 위해 병원에 입원하고 남자는 밖에서 기다리다가 배를 채우기 위해 근처 선술집에 간다. 선술집이기에 제대로 된 식사가 없었는지 양배추와 소시지를 찐 것을 내놓는다. 매우 뜨거워서 그냥은 먹기가 힘들었지만 차가운 맥주와는 그럭저럭 먹을 만했다는 묘사가 나온다. 식사 후 남자는 병원에 돌아오며 산모가 위태롭다는 의사의 말을 듣고 여자와 잠시 이야기를 나눈다. 잠시 뒤, 여자는 저세상으로 떠난다. 남자는 비속을 걸어 호텔방으로 돌아온다. 이 마지막 부분이 상당히 인상적인데 이 부분을 성에 차게 쓰기 위해 헤밍웨이는 16번인가 퇴고했다고 한다. 헤밍웨이 특유의 건조하고 힘이 빠진 묘한 매력의 문체가 특히 이 부분에서 극치를 이루는 듯하다. 이 음식은 불행히도 국내에는 파는 곳이 없는 듯하여 못 먹어봤다. 

4. 레마르크의 <개선문>

소설 초반에 의사인 주인공이 다리에서 투신자살을 시도하는 여주인공을 구해주고 이 여자를 근처 카페로 데려간 후, 크로와쌍이란 빵과 뜨거운 커피를 사준다. 크로와쌍과 뜨거운 커피는 프랑스 다수 서민들이 즐기는 아침식사라는데 이 소설을 보고 굉장히 맛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름 잘한다는 빵집에서 사다 먹어 봤지만 한식 체질인지 그냥 그랬다. 어쨌든 독일의 프랑스 침공을 앞두고 프랑스로 망명한 여배우와 마찬가지 신분의 의사가 암울한 현실 속에서 서로에게 빠져드는 이 장면은 두고두고 기억에 남을 것이다. 중국의 등소평도 프랑스 유학 중 이 빵에 빠져서 중국에서도 즐겨먹었고 이 탓에 사상이 불순하다는 공격을 받았다는 설이 있다.

5. 전혜린의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천재 소리 들었지만 자실로 생을 마감한 저자의 유일한 작품이다. 독일 유학 시기를 주로 다룬 이 에세이집에는 독일에서 먹은 소시지와 수프가 매우 맛있게 서술되어 있다. 뽀얀 안개등 속에서 길에서 파는 갓 구운 소시지를 소스에 찍어 먹는 맛은 어떨지 매우 많은 상상을 하게 한다. 독일은 소시지로 유명하다는데 아직 가보질 못해서 못 먹어 봤다.

6. 슈미트의 <북아프리카의 롬멜>

유명한 작품은 아니라서 시중에서 구하기 어려울 수 있다.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슈미트라는 이름을 가진 독일 장교가 북아프리카에서 약 1년간 롬멜의 부관 역할을 한 경험을 바탕으로 쓴 책이다. 항상 사병과 동일한 식사와 잠자리를 고수함으로써 사병들의 신망을 얻은 롬멜의 대단함을 확인할 수 있다. 내가 기억하는 장면은 슈미트가 중요한 명령을 전달하기 위해 모 기자와 롬멜 전용기를 타고 비행하다가 모래폭풍을 만나서 잠시 착륙한 후에, 이 기자와 비행사와 함께 계란을 한 사람당 세 개씩 삶아서 모래폭풍 속에서 커피와 먹는 부분이다. 입에 모래가 까끌거렸지만 간만에 먹은 신선한 계란과 커피가 너무 맛있었다고 슈미트는 적고 있다. 요즘은 아무것도 아닌 삶은 계란을 먹을 때마다 이 장면을 떠올리면 뭔가 감흥이 다르다.

7. 수호지의 노지심

노지심은 노달이 본명인데 오늘날로 치면 일선 경찰관을 하다가 무뢰배를 실수로 죽인 후 지심이란 법명을 얻고 중이 된다. 하지만 천성이 호탕하고 술과 고기를 즐기는지라 중이 된 후에도 근처 개고기 집에서 술과 개고기를 마구 먹고 여행을 중 만난 부잣집에서는 오리 한 마리를 통째로 다 먹기도 한다. 남자답고 마초적인 식사의 원조가 노지심이 아닌가 생각된다. 한 여름에 다 벗고 가슴에 기름을 흘린 것도 모른 채 고기를 먹을 때마다 제2의 노지심이 된듯하여 짜릿하다.

8. 레마르크의 <서부전선 이상없다>

주인공이 속한 부대가 전투를 마치고 복귀한 후 저녁식사를 기다리고 있다. 그런데 식사는 부대원 수를 기준으로 준비되었지만 전투 중 반 이상의 부대원이 전사했기에 1인당 2인분 이상의 식사가 주어진다. 간만에 실컷 순대랑 빵을 먹을 수 있다는 기쁨을 느끼는 주인공을 보며 산 자와 죽은 자, 그리고 인간의 본능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다. 어쨌든 이 장면을 보고 시장에서 사다 먹은 순대는 매우 맛있었다.

9. 개빈 라이얼의 <미드나잇 플러스 원>

주인공은 2차대전 중에는 레지스탕스였고 지금은 일종의 경호원 혹은 해결사 역할을 하고 있다. 모 백만장자를 약속한 시각까지 주주총회의 장소에 안전하게 모셔갈 임무를 위탁받았는데 같이 일하기로 한 보디가드가 알고 보니 알콜중독자이다. 눈앞의 한 잔에 집중하지 못하고 이 한 잔을 다 마시고 나면 어디서 또 술을 구할 수 있을지 걱정한다는 사실이 알콜중독자들의 가장 슬픈 점이라는 말을 이 보디가드가 하며 마티니의 맛을 슬프게 묘사하는 부분이 있다. 나는 술이 무척 약하다. 일 외에는 거의 안 먹는다. 소주 2잔, 맥주 5백이면 취한다. 하지만 이 부분을 보고 마티니를 먹어 봤다. 역시나 맛없었다. 소설은 이래서 현실과 다른가 보다.

10. 모 단편 추리소설 속의 흉기로서의 음식

제목과 작가는 기억 안 나지만 일본의 어떤 추리소설을 보면 딱딱하게 굳은 시루떡 덩어리로 살인을 하고 애도하러 온 사람들에게 떡국으로 제공함으로써 완전범죄를 꾀하는 장면이 나온다. 냉동된 고깃덩어리로 살인을 하고 이를 형사들에게 스테이크로 제공하는 영미 추리소설도 비슷한 맥락이다. 살인의 도구라서 꺼림직하기는 하지만 나름 음식 묘사는 훌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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