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전 산에서 있었던 일이다. (이달 초부터 #폭염을 피해 동네 뒷산을 밤에 운동 차 다닌다. 익숙한 길이고 핸드폰 보조등 성능도 좋기에 별다른 문제가 없었다).
여느 때처럼 가파른 코스를 오르고 있는데 모퉁이 외진 곳에 어른거리는 불빛을 배경으로 허연 무언가가 보였다. 보조등을 비추자 하얀 소복을 입고 머리가 긴 여자가 갑자기 고개를 돌려 나를 째려본다. 귀신의 존재는 믿지 않지만 순간 영화 속 악귀들이 떠오르며 노상방뇨부터 시작하여 내가 그동안 저지른 사악한 짓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공포에 떨며 나도 모르게 주저앉았는데 그 여자가 당신은 누구냐고 묻는다. 애써 침착함을 유지하며 등산하러 온 사람이라고 하자 왜 늦은 시간에 왔느냐고 또 묻는다. 귀신이라면 이런 질문을 안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며 차츰 제정신이 돌아왔다. 그건 내 마음이라 답하며 당신이야말로 이 시간에 여기서 뭘 하냐고 쏘아붙였다.
인근에 사는 무속인인데 관우 장군과 접신하기 위해 기도 중이라고 한다. 이 동네가 오래된 동네라 그런지 무속인이나 역술인들이 많이 살고 있다. 말 같지도 않은 짓거리를 해서 왜 사람 놀래 켰냐는 항의가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간신히 참았다. 이 시간에 여기서 간절히 기도할 정도면 그 효과를 떠나서 일단 노력하는 자세는 갖춘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나는 종교가 없고 접신이나 무속도 솔직히 믿지 않지만 이 시간에 이렇게 기도할 정도면 참 고생하시는 것 같다고 말하자 은근히 기분 좋아한다. 집이 어디냐 하기에 근처에 산다고 하자 명함을 하나 주며 그냥 마음이 안 좋을 때 들르란다. 무속인이라고 항상 굿만 하는 것은 아니고 커피값 정도만 내면 간단한 상담도 가능하다고 한다. 말투에서 기본은 갖춘 티가 난다.
토착종교를 무조건 경시하고 무시했던 스스로를 반성한다. 내겐 별다른 문제가 없지만 한국토착신앙의 현주소에 대한 전문가의 입장을 들어보기 위해 조만간 한 번 방문할 것 같다. 촛불이 배경이었지만 예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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