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간만에 고려대에 다녀왔다.
난 이곳 방문을 무척이나 싫어한다.
내 모교지만, 손 한 번 못 써보고 허무하게 날려버린 청춘을 자꾸 떠오르게 하기에 어지간하면 안 간다.
하지만 오늘은 비즈니스 미팅의 성격도 있었고 상대가 일방적으로 여길 장소로 지정해 왔기에 어쩔 수 없었다.
근 10년 만의 방문인데 그동안 엄청 변했다.
좋게 말하면 아주 아기자기하고 예쁜 캠퍼스로 변모했다.
눈에 넣어도 안 아플 만큼 깜찍하고, 새로 생긴 건물들도 디자인이 멋지다.
반면 나쁘게 말하면 남성적, 대륙적, 거시적 분위기는 대폭 쇠퇴했기에 나로서는 꽤나 불만이다.
만남의 장소가 공교롭게 꽤나 낯 익는 곳이다.
지금은 아주 큰 레스토랑과 커피샵이 자리 잡고 있지만 내 재학시절 여기엔 다 무너져가는 가건물만 있었다.
그 안에서 어떤 중년 여성이 콩나물밥을 단돈 천 원에 팔았고 가난했던 나의 주식이었다.
밥, 콩나물, 간장 그리고 김치 약간만 주어졌지만 내 입엔 꿀이었다.
오늘은 진수성찬을 먹었고 굉장히 비싼 술도 마셨다.
싸구려 콩나물밥으로 허기를 달래던 그때가 그래도 그립다.
당시엔 당장 주머니에 돈은 많지 않았지만 얼마든지 내가 개척할 수 있는 미래와 자신감이 있었다.
지금은 그냥저냥 먹고는 살지만 기력은 쇠한 채, 미래에 대한 기대도 없다.
그 사고가 날 완전히 바꿨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잊고 매몰원가 취급해야 한다며 아무리 되뇌어도 절대 안 된다.
그 사고 자체가 아니라 이 사고로 인한 영향을 못 잊는 습관이 나를 결국 잡아먹을 것임을 누구보다 잘 알지만 반복하고 반복하고 반복해서 그때만을 생각한다.
그 사고 이후 난 좀비가 되었다.
그 사고 없었을 때의 내 인생을 상상하지 않은 날이 하루도 없다.
오늘도 겉으론 전혀 티를 내지 않았지만 그 사고 직전의 자신만만하고 세상 모든 걸 가진 듯하던 모습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이런 내가 나도 지겨운데 남들 눈엔 오죽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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