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시절 어느 추석 때 일이다.
서울이 고향이고 친척 간 왕래가 많지 않기에 추석임에도 학교 #도서관에 갔다. 특별히 할 공부는 없었지만 자기만족감에 간 것이다.
그 즈음 도서관에서 자주 보이던 여학생이 있었다. 마음에 들어서 어떻게든 말을 걸고 싶었지만 기회가 없었는데 마침 그날 그 여학생도 도서관에 나왔다.
대충 점심시간이 될 무렵, 메모를 전했다. 마음에 드니 밥이나 커피를 사주고 싶다는 내용이었던 것 같다. 잠시 뒤 엄청나게 덩치가 좋은 남학생이 좀 보자고 한다. 휴게실에 나가보니 그 여학생도 와 있던데 둘이 커플이었다. 자기 여자를 건드린 게 기분 나빴는지 말이 상당히 거칠었다. 원칙적으로 내가 잘못했고 워낙 떡대가 좋기에 자연 위축이 되었다.
다시는 이러지 말라는 흥분된 어조의 이야기를 들으며 혹시 럭비부인지 물었다. 그렇다고 한다. 하긴 그 정도 덩치 가진 학생은 럭비부 외에는 있을 리가 없었다. 그 말을 듣자마자 요즘 럭비부 성적이 왜 그 모양이냐며 바로 공세로 전환했다. 학우들이 많은 관심을 보이고 학교도 적지 않은 지원을 하는데 왜 각종 대회에서 부진하며 특히나 라이벌 학교와의 정기전에서 왜 계속 지냐고 날카롭게 질문했다.
상당히 미안해한다. 갑자기 갑을관계가 역전되었다. 훈련은 신경 안 쓰고 이렇게 연애질이나 하니 성적이 그 모양이 아니냐며 언성을 높였지만 아무 말 못하고 그 커플은 듣기만 한다. 은근히 통쾌했다. 계속 이야기하며 그 커플의 학번이 나보다 높다는 것도 알았지만 너무 아픈 곳을 찔렸는지 거의 저항을 못한다. 앞으로 연애 그만하고 팀 승리에도 신경 쓰라는 일장훈계를 하고 열람실로 돌아왔던 것 같다.
이 커플은 지금 어딘가에서 아들, 딸 낳고 잘 살고 있으려나? 이제 곧 다가올 가을을 생각하니 불현듯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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