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레스토랑의 이름은 '황태자의 첫사랑'이었다.
고딩 시절, 버스를 잘못 타서 헤매다가 서대문과 종로 중간쯤에 자리 잡고 있던 이 가게를 처음 보게 된다.
낭만적인 이름이 꽤나 인상적이기에 대학입학 후 꼭 방문하여 혼술을 하리라 맹세한다.
하지만 내 눈높이에 미치지 못하는 대학에 갔기에 자격이 없다며 입학 후 나는 애써 이 근처를 피해 다니기까지 했다.
졸업 전에 큰 시험에 붙으면 방문하리라 목표를 수정했다.
하지만 현실은 절대 녹녹치 않았고 시험합격은커녕 오히려 큰 사고를 당하며 여전히 이곳에서 한잔할 자격이 없다고 여기게 된다.
요양원에서의 기나긴 투병기간 동안 난 이곳을 종종 생각했다.
이젠 과거처럼 아주 대단한 목표에 연연할 상황이 아니기에, 다시금 몸이 좋아져서 뭘 하든 혼자 먹고 살 수만 있게 되면 기필코 가서 자축을 하리라 다짐한다.
몇 년 뒤, 기적처럼 몸이 좋아졌고 내 몸뚱아리 하나는 건사하게 됐다.
하지만 주어진 것에 만족 못하는 기질은 겨우 하류층에 진입한 지금 그 곳에 가서 축하를 한다면 세상 모두가 웃을 거란 아주 이상한 논리를 개발해낸다.
그러다 노무사 시험을 준비하게 되었고 처음 생각과는 달리 누차 물을 먹으며 시험에 합격하면 반드시 이 레스토랑에 갈 거라 맹세한다.
하도 논술에 자신이 없기에 절대 이 꿈을 이루지 못할 거라 예상했던 나에게 몇 년 뒤 하늘은 합격이란 큰 선물을 줬다.
이제 가서 진탕 마시기만 하면 되지만 아직 본격적인 노무사업을 시작도 안 했으니 이르다는 생각을 또 한다.
노무사로 자리 잡고 스스로 자랑스러워 할 정도가 되면 가야겠다고 재차 목표를 수정한다.
그 뒤 내가 원하는 수준의 노무사가 되지는 못했다.
책을 2권 내며 나름 전문가 소릴 듣기는 하지만 지금도 내 성엔 안 찬다.
어제 불현듯 이 가게 생각이 났고 이러다 평생 못갈 지도 모르겠다는 우려가 들었다.
무엇보다 늘 스스로를 채찍질만 하는 내가 더 없는 바보로만 느껴지며 인생을 보는 시각 자체에 회의가 든다.
가장 좋은 양복바지와 와이셔츠, 가죽 재킷을 꺼내 입고 그곳으로 향했다.
다 늙은 나이에 이룬 게 일절 없을지라도 나 자신을 사랑하고 싶었고 그 상징적 의미로 꼭 이곳에 가고 싶었다.
수십 년 만의 방문이지만 하도 생각을 많이 해서인지 길이 낯설지 않다.
하지만 바로 앞에 도착해보니 가게가 사라졌다.
이상한 낙지가게가 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주위 사람들에게 황태자의 첫사랑이란 이름의 레스토랑을 물어봐도 누구도 모른단다.
구글검색을 했지만 전국 그 어디에도 이런 이름의 양식집은 없다.
내가 날 거부하고 내가 날 부인하며 내가 날 사랑하지 않으면 세월도 마찬가지로 날 버리나보다.
스스로를 학대하고 살아온 것에 대한 죗값을 신이 이제 나에게 준엄하게 요구하는 시점에 도달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늦어도 좋다.
신이 감옥에 가라면 가겠지만 그 안에서라도 이젠 날 사랑할 거다.
근처 다른 레스토랑에 갔다.
와인과 비후가스를 주문했다.
대낮이라 손님은 나뿐이었고 늙수그레한 주인이 묻는다.
좋은 일 있으시냐고.
이제라도 아무 조건 없이 날 사랑하게 된 걸 축하하는 자리란 말은 차마 못했다.
“그냥요”란 한마디를 웃음과 함께 던졌다.
버스로 1시간이면 충분히 도달할 거리를 난 30년이 넘게 걸렸다.
이런 날 그래도 사랑하고픈데 괜찮겠지?
'자아(존중,비하,찾기,성장)'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내 혀가 효도르 급이라는데 칭찬이 절대 아닌 듯 (0) | 2022.07.13 |
---|---|
계속 본색을 속이고 살아도 되는지 엄청난 가책을 느낀다 (0) | 2022.07.11 |
판례의 진정한 의미조차 제대로 파악 못 하는 내 머리 (0) | 2022.07.07 |
북한에도 나같이 욕망을 억누르기만 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네 (0) | 2022.07.04 |
당신이 이상한 사람들만 만나게 되는 근본 이유 (0) | 2022.07.03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