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로운 아이들

다이소 색연필과 얼음 같은 내 마음

강명주 노무사 2023. 4. 24. 08:20

"분도 형제님, 나예요"

"수녀님, 무슨 일이시죠?"

"바쁘실 텐데 자꾸 전화해서 미안해요"

"용건만 간단히 말씀해 주시죠"

"참 면목 없지만 또 도와달라고 전화했어요"

"이번엔 뭐죠?"

"애들 미술용품이 다 떨어져서 제대로 그림도 못 그리네요. 그거 후원 좀 해주면 좋겠는데...."

"의식주 문제라면 제 능력껏 해드릴 용의가 충분히 있습니다. 하지만 그림 못 그린다고 삶에 큰 지장 있나요? 사치라 생각 안 하세요?"

"그게 사람이 밥만 먹고 살 순 없잖아요"

"저는 수녀님과 생각이 다릅니다. 어려운 환경이라면 그 환경에 맞추는 것도 필요하다고 봅니다. 이런 전화는 이제 하지 말아 주세요. 그리고 저는 현재 어떤 종교도 안 믿으니 분도라는 본명으로 부르지 마십시오"

한 달 전쯤 나눈 친분 있는 #수녀님과의 대화.

보육원(고아원) 일에 열심이시라 이런 전화를 간혹 하시는데 이번엔 일부러 냉랭히 받았다.

아주 어릴 때 일이다.

초등학교도 들어가기 전이었는데 동네 친구가 색연필을 들고나왔다.

아주 큰 시내 백화점에서 엄마가 사준 거라며 자랑했고 어린 내가 봐도 상당히 좋아 보였다.

색연필 머리 부분을 빙글빙글 돌리면 자동으로 심이 나오는 구조라 사용이 간편했고 색깔도 12가지나 되었던 것으로 기억난다.

나도 좀 써보자고 만져보려 했지만 이 친구는 보는 것만 허락했고 화가 나서 한 대 치자 울기 시작했다.

결국 이 애 엄마가 나와서 전후 사정을 듣더니 날 때리기 시작했고 이미 그때부터 보호자가 실질적으로 없다시피하던 나는 복날 개처럼 맞을 수밖에 없었다.

그 뒤로도 가난 탓에 색연필이나 물감 등은 제대로 가져본 적이 없고 이를 이유로 미술 선생에게 혼만 나다 보니 미술 자체가 아주 증오스러웠다.

아마도 이 기억이 전술한 수녀와의 대화에서 날 냉혹한 스크루지로 만들었을 것이다.

며칠 전 다이소에 사무용품을 사러 갔다.

이리저리 뒤지고 있는데 꽤나 큰 금속제 케이스가 보인다.

뭔가 하고 들여다보니 색연필이다.

무려 50가지 색깔이기에 상당한 가격이리라 예상했지만 단돈 5천 원이다.

대단히 조악한 품질일 거라 여기고 그냥 돌아온 뒤 인터넷 후기를 보았다.

가성비가 뛰어나다는 평가가 대부분이다.

인터넷으로도 판매하기에 20개를 주문해서 전술한 수녀님의 보육원으로 보냈다.

애들이 20명 가까이 된다고 말했던 걸 들었던 것 같다.

오늘 아침 일찍 수녀님에게서 전화가 왔다.

지난 주말에 도착했고 품질도 우수해서 아이들 모두가 좋아한단다.

역시 내 속마음은 따뜻하다며 칭찬을 하신다.

전혀 아닌데.

내 마음은 영원히 녹지 않는 얼음인데.

이번 구매는 일반적인 시장가를 벗어나는 특이한 물품들에 대한 호기심의 충족 차원에서 행해졌을 뿐인데.

여튼 다이소에서도 잘만 고르면 좋은 물건 많고 냉혈한인 나도 가끔은 미친 짓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