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화여대가 잘 나갔던 이유와 무분별한 자식사랑의 병폐
"노무사님, 지난번에 제안서 넣으신 컨설팅을 올 봄에 좀 해주세요"
"아, 상무님. 제가 올 봄엔 이미 다른 선약이 많이 잡혀서 곤란한데요. 정말 죄송합니다"
이화여대엔 아주 독특한 불문율이 있었다.
기혼이 아닌 미혼여성만 이대 총장이 될 수 있다는 게 바로 그것이다.
아무래도 가정이 있는 여자는 대학 총장으로서의 임무에 전념하기 힘들다고 여겨서 암묵적으로 만들어진 룰 같은데 90년대 중반 깨지고 만다.
지금 보면 너무 가혹할 지 모르나 한때 여자는 서울대 아니면 이대 간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이대의 위상이 높았던 데는 이 불문율도 아주 큰 역할을 했으리라 나는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이대를 제외한 다른 대학에도 이 정도는 아니지만 보다 효율적이고 합리적인 대학경영을 위한 불문율들이 있었다.
설립자와 그 친인척은 가능한 대학운영에 참여하지 않는다는 룰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재단엔 참여했지만 해당 대학의 총장이나 이사장 자리는 늘 유능한 제3자를 앉힘으로써 전문경영인 제도의 장점과 유사한 효과를 도모하는 게 과거 대학가의 일반적 분위기였다.
하지만 이젠 완전히 변했다.
상당수 능력이 검증되지 않는 자들조차 설립자와 혈연관계란 이유만으로 총장이나 이사장 자리까지 떡하니 차지하는 게 작금의 현실이다.
이로 인해 대학운영이 자의적, 비합리적으로 흐르는 건 당연지사고 더 나아가 이들에게 빌붙어 권세를 바라는 간신 같은 교수들이 득세하는 모습을 오늘날 적지 않은 대학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이런 현상의 가장 큰 원인은 자식사랑을 전혀 제어하지 않는 사회풍토일 것이다.
과거엔 아무리 자식을 이뻐해도 공익이나 공정성까지 해치면 다수가 손가락질을 했다.
그렇기에 사장이나 대학설립자의 자식이라도 능력이 검증되지 않는 한, 그 회사나 대학의 최고자리엔 오르지 못했고 이를 어길 시엔 꽤나 혹독한 비판을 감수해야 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딸바보, 아들바보란 말이 당연시 되며 자식새끼를 위해선 부정부패를 저질러도 비난은커녕 자식사랑이란 명분하에 오히려 옹호되기도 한다.
고대 로마의 결정적 멸망원인으로 황제를 위시한 귀족층이 자신들의 의무는 등한히 하고 권리만 찾았다는 점을 대다수 학자들은 들고 있다.
아우구스투스에 의해 제정(왕에 의한 지배)이 확립되기 전의 고대 로마, 즉 공화정하의 로마에선 귀족층도 당연히 병역의 의무를 져야했고 목숨 걸고 이민족과 싸우며 로마를 지킨 경력이 있어야 집정관 등 높은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
이 당연시 되던 의무를 제정 이후 황제와 귀족들은 거부하기 시작했고 결국 이는 애국심이 아닌 돈에 의해 움직이는 용병의 득세와 민심이반으로 이어져 마침내 로마는 찬란한 역사와는 전혀 안 어울리는 비참한 종말을 맞는다.
학력고사(요즘으로 치면 수능) 시절엔 대학교수의 아들딸도 지가 공부 안 하면 좋은 대학 못 갔다.
요즘은 수시란 아주 희한한 제도 덕(?)에 친한 교수들끼리 서로의 자식들에게 이미 고딩 시절부터 좋은 스펙을 쌓을 기회를 부여함으로써 이 자식들은 엄청 수월하게 좋은 대학을 갈 수 있다.
비단 대입에서만이 아니라 나중에 학위를 받고 대학교수가 될 때도, 부모가 교수인 자들은 성골이고 일반인 부모를 둔 강사들은 진골이란 말이 나올 정도로 용이하게 교수자식들은 각 대학에서 한 자리를 차지한다고 대학 관계자들은 이야기 하곤 한다.
과연 세상이 이렇게 흘러가도 괜찮나?
아주 오래 전, 객관적 측정수단이 거의 없거나 측정비용을 사회가 감당한 여건이 안 되던 시절엔 부모가 똑똑하면 자식도 그러리라 추측하고 이들에게 어드밴티지를 주는 게 어찌 보면 가장 가성비가 놓고 합당한 인재 선발법이었다.
하지만 수 없이 많은 평가지표와 방법이 개발된 오늘날에도 우수한 부모를 가진 자들을 무조건 우대한다면 그렇지 않은 인재들의 의욕저하로 이어져 결국 국가 전체적으로도 득보다 실이 많지 않을까?
이 글 맨 앞의 대화는 모 회사 관계자와 며칠 전에 내가 나눈 것이다.
인사노무 관련 컨설팅을 하고파서 제안서까지 넣었던 회사인데 막상 오케이가 떨어지자 도리어 내가 거절을 했다.
진짜 바빠서 그런 게 아니다.
얼마 전 이 회사 사장자리에 기존 사장의 아들이 앉았는데 그 별명이 삼국지 속 ‘아두‘일 정도로 무능하다는 게 근본 원인이다.
내부적으로도 반발이 많았지만 오너인 기존 사장이 어떻게든 지 아들에게 사장자리를 넘겨주려 별 짓을 다 했고 그 과정에서 올곧은 소리 하는 충신들 여러 명의 모가지까지 날아갔다는 소문이 들린다.
이런 회사에 섣불리 컨설팅 들어가면 개고생만 한다.
회사를 위한 마음에 객관적인 쓴소리를 하면 고마워하기는커녕 이런 소리 들으려고 우리가 큰돈 내는 거냐며 반론이 거세다는 걸 이미 여러 회사에서 경험했다.
수장인 사장부터 정실인사에 의존하는 회사가 전반적인 직원관리에 있어선 공정성을 추구할 리 만무하지 않은가?
그렇다고 내 성격상 입 발린 소리로만 컨설팅 보고서를 채울 수 없다.
내 회사도 아니니 망하든 말든 이렇게 대충 보고서 작성하고 편하게 돈 벌어 먹는 걸 즐기는 자격사들도 있는 눈치지만 이런 식으로 일한다는 게 소문나면 금세 이 바닥에서 퇴출된다.
그렇기에 다른 일을 핑계로 거부를 했고 전혀 후회하지 않고 있다.
꼼수를 써서라도 군대를 안 보내는 등 자식을 위해선 뭐든지 하는 부모들 보면 차마 면전에서 하지는 못하나 목구멍까지 올라오는 소리가 있다.
당신들의 그 행동이 결국 자식을 망칠 거라고.
세상이 아무리 미쳐서 거꾸로 돌아가도 정의는 살아 있다고.
불공정에 몸이 익은 당신 자식이 나중에 어떤 행동까지 할 지 아무도 모르겠지만 결국 한도를 초과하여 몰락하는 게 보통이며 이 자식은 운이 좋아 그러지 않더라도 손자, 손녀 대에선 반드시 미친 짓을 할 거라고.
왜 그 많은 천재들이 힘을 합쳐 세운 수많은 왕조들이 결국은 망하고 말았을까?
왕의 자식에게 무조건 왕위를 넘긴다는 룰이 근본적 이유였다.
대한민국 역시 자식사랑이란 명분하에 별별 개짓거리 다하는 부모들을 제어하지 못한다면 사회 전체의 공정함이 깨져서 결코 오래 못 갈 거라는데 내 전 재산을 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