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아(존중,비하,찾기,성장)

텍스트 속의 나와 실제로 만났을 때의 나는 너무 다르다네

강명주 노무사 2022. 8. 8. 01:33

"노무사님은 서면만 보면 무척이나 젠틀하고 합리적인데 실제로 만나보면...."

아까 모 #감독관이 나에게 한 말이다.

맞다.

나는 직접 대면 접촉할 때와 서면으로 나를 표현할 때의 갭이 너무 크다.

혹자는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 수준이라던데 왜 그런지 곰곰이 생각을 해봤다. 

일단 서면으로 내 의사를 표현할 때는 저절로 최대한 이성적이 된다. 내가 글을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한 건 노무사 수험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법학이나 인사관리의 기초가 전혀 없는 상태에서 합격을 노리다 보니 그저 암담하기만 했는데 돈이 없어서 학원마저 못 다니니 말 그대로 맨땅에 헤딩하기였다.

그래서 택한 방법이 교수들 교과서를 그대로 베끼는 것이었다.

수험서가 물론 외우기 편하고 양이 적지만 나 같은 초보가 독학하기에는 리스크가 크기에 교과서를 미친 듯이 베껴 쓰기 시작했다.

이런 무식한 방법으로 합격이 가능하기나 할지 회의도 많이 들었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기에 목에 디스크가 생길 정도로 쓰고 또 썼다.

처음엔 그저 무작정 베끼기만 했지만 점차 내공이 쌓이자 중간중간 의문이 들었고 이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아주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었다,

결국 내 글쓰기의 토대는 가장 지적인 집단인 교수들의 교과서이고 내 이름 걸고 나가는 글에 대한 무한한 책임감도 느끼기에 언제 어떤 글을 써도 최대한의 논리와 이성이 자동적으로 갖춰진다.

반면 대면접촉 시에는 아무리 억누르려 해도 다른 인간관계에서 생긴 스크래치, 배신감, 원망 등이 떠오르며 또 다른 상처를 피하고 싶어지기에 자연히 공격적, 감정적 모습을 보이게 된다.

페친 중에는 나를 실제로 만나본 사람이 거의 없을 텐데 죽을 때까지 가급적 안 보는 것이 내 이미지를 그나마 유지하는 최선책이라는 걸 슬프지만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내가 진짜 분노하는 것을 본 극소수 사람들은 억만금을 줘도 나랑 다시는 전화조차 하기 싫다고 한다. 교도소를 밥 먹듯 드나들며 각종 인간 말종을 상대해 본 사람들조차 나 같이 무서운 사람은 본 적이 없다고 할 정도니....

이런 억눌리고 비비 꼬인 앙금이 과연 조금이라도 사라질지 그리고 이를 감추고 사는 게 과연 언제까지 가능할지 정말 의문이다.

텍스트 속의 나와 실제로 만났을 때의 나 중 과연 어떤 내가 진짜 나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