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벨상까지 받은 작가의 사회적 매장에서 내가 배우는 점
어제와 오늘에 걸쳐 소설 <굶주림>을 보았다.
#크누트 함순이란 작가가 몸소 체험한 빈곤을 아주 리얼하게 그린 작품으로 도스토예프스키보다도 더 심리 묘사에 뛰어나다는 인상을 나는 받았다.
이 작가는 노르웨이 사람으로 이 작품으로 이름을 알린 뒤, 1920년엔 노벨 문학상도 받는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물론 전 세계적으로도 이젠 거의 잊혀졌고 그 이름을 입에 올리는 걸 터부시하는 자들도 적지 않다.
이유는 간단하다.
2차 대전 당시 히틀러와 나치를 추앙했고 심지어 히틀러가 죽은 뒤 그를 추도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로 치면 악질 친일파라고나 할까.
이 탓에 종전 후 거액의 벌금형에 처해졌고 사회적으로 매장되어 홀로 지내다 쓸쓸히 죽어갔다.
난 이 사람을 보며 두 가지를 느낀다.
하나는 사회가 용인하는 한도는 벗어나는 건 정말정말 위험하다는 사실이다.
이 작가가 살인이나 강간을 했어도 이토록 일방적으로 잊힌 채 비난만 받지는 않았을 것이다.
고스톱 쳐서 노벨상 받은 게 아니기에 갖가지 변명을 문학평론가들이 앞 다투어 대신 해줬을 게 뻔하다.
하지만 히틀러에 대한 추앙은 전 세계 어디서도 쉴드 쳐주지 않고 그 여파는 사회적 매장까지 불러오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런 걸 생각하니 자유로운 내 성향도 다소는 자제할 필요성을 새삼 느낀다.
다른 하나는 그가 겪은 가난과 히틀러 추종 간 상관관계이다.
이 작가는 무식꾼의 자식으로 태어나 9살부터 일을 해서 돈을 벌었고 교육은 거의 받지 못한 채 밑바닥 인생을 전전하다 독학으로 문인이 되었다.
이런 그의 전력 덕에 <굶주림> 같은 훌륭한 작품을 남기기도 했지만 반사회적 성향 역시 커지지 않았을까?
이 성향은 문인으로 크게 성공하자 늘 억눌러진 채 감춰진 상태였겠지만 80이 넘은 노년이 되어 이성이 마비되고 짐승의 본능만이 남자 다시 튀어나온 게 아닐까?
그가 나치 추종을 시작한 게 80세가 넘어서이고 이 나이가 되면 보통은 다시 아기가 된다는 통념을 고려하니 나는 이런 결론에 도달했다.
백수 시절 나 역시 아주 많은 반사회적 성향에 시달렸다.
실행에 옮긴 적은 없지만 굉장히 다양한 나쁜 짓을 머릿속으로 획책했다.
그러다 노무사가 되자 이들 성향은 자연히 꼬리를 내렸지만 내가 나이가 아주 많이 들고 이성이 사라진다면 다시 나타나지 말라는 보장이 없다.
<달과 육펜스>로 유명한 서머셋 모옴도 그랬다.
젊은 날의 지나친 빈곤은 이성을 마비시키며 영혼까지 좀 먹는다고.
함순이 그의 작품에 묘사한 가난의 정도는 인간으로서 인내할 수 있는 수준을 현저히 넘어선 것이었다.
이런 가난이 없었어도 그가 말년에 히틀러 추종이란 미친 짓을 했을까?
나중에 이성이 사라지고 난 뒤, 나는 과연 어떤 행동을 하게 될지 솔직히 무지 걱정이 된다.
그때를 위해서라도 지금 적당히 즐길 건 즐기고 풀 건 풀며 마음에 과도한 앙금을 남기지 않고 살아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