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언론

노벨상까지 받은 작가의 사회적 매장에서 내가 배우는 점

강명주 노무사 2022. 5. 13. 01:08

어제와 오늘에 걸쳐 소설 <굶주림>을 보았다. ​

#크누트 함순이란 작가가 몸소 체험한 빈곤을 아주 리얼하게 그린 작품으로 도스토예프스키보다도 더 심리 묘사에 뛰어나다는 인상을 나는 받았다.​

이 작가는 노르웨이 사람으로 이 작품으로 이름을 알린 뒤, 1920년엔 노벨 문학상도 받는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물론 전 세계적으로도 이젠 거의 잊혀졌고 그 이름을 입에 올리는 걸 터부시하는 자들도 적지 않다. ​ ​ ​

이유는 간단하다.​

2차 대전 당시 히틀러와 나치를 추앙했고 심지어 히틀러가 죽은 뒤 그를 추도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로 치면 악질 친일파라고나 할까.​

이 탓에 종전 후 거액의 벌금형에 처해졌고 사회적으로 매장되어 홀로 지내다 쓸쓸히 죽어갔다.​

난 이 사람을 보며 두 가지를 느낀다.​

하나는 사회가 용인하는 한도는 벗어나는 건 정말정말 위험하다는 사실이다.​

이 작가가 살인이나 강간을 했어도 이토록 일방적으로 잊힌 채 비난만 받지는 않았을 것이다.​

고스톱 쳐서 노벨상 받은 게 아니기에 갖가지 변명을 문학평론가들이 앞 다투어 대신 해줬을 게 뻔하다.​

하지만 히틀러에 대한 추앙은 전 세계 어디서도 쉴드 쳐주지 않고 그 여파는 사회적 매장까지 불러오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런 걸 생각하니 자유로운 내 성향도 다소는 자제할 필요성을 새삼 느낀다. ​

다른 하나는 그가 겪은 가난과 히틀러 추종 간 상관관계이다.​

이 작가는 무식꾼의 자식으로 태어나 9살부터 일을 해서 돈을 벌었고 교육은 거의 받지 못한 채 밑바닥 인생을 전전하다 독학으로 문인이 되었다.​

이런 그의 전력 덕에 <굶주림> 같은 훌륭한 작품을 남기기도 했지만 반사회적 성향 역시 커지지 않았을까?​

이 성향은 문인으로 크게 성공하자 늘 억눌러진 채 감춰진 상태였겠지만 80이 넘은 노년이 되어 이성이 마비되고 짐승의 본능만이 남자 다시 튀어나온 게 아닐까?​

그가 나치 추종을 시작한 게 80세가 넘어서이고 이 나이가 되면 보통은 다시 아기가 된다는 통념을 고려하니 나는 이런 결론에 도달했다.​

백수 시절 나 역시 아주 많은 반사회적 성향에 시달렸다.​

실행에 옮긴 적은 없지만 굉장히 다양한 나쁜 짓을 머릿속으로 획책했다.​

그러다 노무사가 되자 이들 성향은 자연히 꼬리를 내렸지만 내가 나이가 아주 많이 들고 이성이 사라진다면 다시 나타나지 말라는 보장이 없다.​

<달과 육펜스>로 유명한 서머셋 모옴도 그랬다.​

젊은 날의 지나친 빈곤은 이성을 마비시키며 영혼까지 좀 먹는다고.​

함순이 그의 작품에 묘사한 가난의 정도는 인간으로서 인내할 수 있는 수준을 현저히 넘어선 것이었다.​

이런 가난이 없었어도 그가 말년에 히틀러 추종이란 미친 짓을 했을까?​

나중에 이성이 사라지고 난 뒤, 나는 과연 어떤 행동을 하게 될지 솔직히 무지 걱정이 된다. ​ ​

그때를 위해서라도 지금 적당히 즐길 건 즐기고 풀 건 풀며 마음에 과도한 앙금을 남기지 않고 살아야 하지 않을까.​